맨위로가기

유덕 (하간헌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덕(하간헌왕)은 전한 경제의 아들로, 기원전 155년에 하간왕에 봉해졌다. 그는 유학을 숭상하여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고서를 수집하는 데 힘썼으며, 《주관》, 《상서》, 《예기》 등 다양한 고서를 모았다. 무제 때 입조하여 아악을 바치고 질문을 받았으며, 재위 26년 만인 기원전 130년에 사망하여 시호는 헌(獻)이다. 그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은 후대에 제후로 봉해졌다.

2. 생애

경제의 아들로, 어머니는 율희(栗姫)이다. 율희는 여태자 유영과 임강왕 유알우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 하간의 왕으로 봉해졌다.[1][2]

평소 유학을 깊이 좋아하고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옛 서적을 열정적으로 수집하여 그 양이 조정의 소장량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2][3] 이러한 학문적 활동과 유학 진흥 노력은 하위 섹션 '유학 진흥과 고서 수집'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무제 때에는 조정에 들어가 아악 등을 헌상하고 황제의 여러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4][2] 자세한 내용은 '무제와의 관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위 26년 만인 원광 5년(기원전 130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으며,[2][1] 사후 대행령 (丘)의 상주로 시호 '(獻)'을 받았다.[2] 그의 왕위는 아들 공왕(共王) 유불해가 이었으며, 하간왕의 작위는 이후 단절과 부활을 거듭하다 왕망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끊겼다.

2. 1. 유학 진흥과 고서 수집

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 하간의 왕으로 봉해졌다.[1][2] 평소 유학을 좋아하여 행동거지를 유학자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했으며, 산동 지역의 많은 유학자들과 교류했다.[1][2]

유덕은 학문을 깊이 탐구하고 옛것을 아꼈으며,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를 견지했다.[3] 그는 민간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면 값을 치르고 빌려와 베껴 쓴 뒤, 원본은 자신이 소장하고 필사본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추가적인 보상까지 하였다. 또한, 먼 곳에서 찾아온 도사나 학자들이 오래된 책을 바치기도 했는데,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가 수집한 고서는 조정의 소장량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간헌왕이 모은 책들은 대부분 이전 시대의 귀중한 고서들이었다. 여기에는 《주관》(周官), 《상서》, 《예》(禮), 《예기》, 《맹자》, 《노자》 등 다양한 경전과 해설서가 포함되었으며, 공자 70인 제자들의 논의나 육예 관련 기록들도 있었다.[2] 당시 책을 좋아했던 회남왕 유안이 다소 가볍고 잡다한 서적을 모았던 것과 비교하면, 유덕은 중요한 고전 중심으로 수집하여 학문적 깊이가 달랐다.

유학 진흥에도 힘써, 《모시》(毛詩)와 《춘추좌씨전》을 연구하는 박사 직위를 설치했다.[2] 스스로 예악을 익히고 유학자의 복장과 몸가짐을 실천하여, 산동의 많은 유학자들이 그에게 와서 학문을 배웠다. 또한, 모생(毛生) 등과 함께 《악기》(樂記)를 저술하기도 했다.

무제조정에 들어가[4] 아악과 팔일무 등을 헌상했으며, 무제가 조서를 통해 내린 30여 가지 질문에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답변하였다.[2]

2. 2. 무제와의 관계

무제 때 입조(入朝)하여[4] 아악(雅樂)과 팔일무(八佾舞) 등을 헌상하였다. 또한 무제가 조서를 내려 질문한 30여 가지에 대해 답했는데, 그 내용이 간결하고 의미가 명확했다고 한다.[2]

2. 3. 죽음과 평가

무제 때 입조하여[4] 아악과 팔일의 춤 등을 헌상하고 삼옹궁(三雍宮)을 대했으며, 무제가 조서로 내린 30여 가지 질문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명확하게 답변하였다.[2] 유덕은 스스로 모생(毛生) 등과 함께 『악기(樂記)』를 저술하기도 했다.

재위 26년 만인 원광 5년(기원전 130년) 정월에 사망하였다.[2][1] 대행령 (丘)가 상주하여 시호(獻)이라 하였다.[2][1] 하간왕의 자리는 아들 공왕(共王) 유불해가 이었다. 하간왕 왕위는 이후에도 계승되어, 한 번 단절되었다가 부활하여 왕망의 시대에 최종적으로 단절될 때까지 이어졌다.

유덕은 학문을 닦아 옛것을 좋아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태도를 지녔다.[3] 유학을 좋아하여 행동거지를 유학자에 맞추었으며, 산동의 많은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1][2] 그는 민간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면 값을 치르고 베껴 원본은 자신이 갖고 사본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도 찾아와 옛 책을 바쳤고, 그가 모은 고서의 양은 한나라 조정의 장서량과 맞먹을 정도였다.[2] 당시 회남왕 유안 역시 책을 좋아했지만, 유안이 모은 책 중에는 비교적 가벼운 내용의 책이 많았던 반면, 유덕이 수집한 책들은 주로 《주관》(周官), 《상서》, 《》, 《예기》, 《맹자》, 《노자》 등 이전 시대의 오래된 경서나 공자의 제자들의 저작들이었다.[2] 또한 육경을 중시하여 《모시》(毛詩)와 좌씨춘추 박사를 두었으며, 예악을 닦아 복장과 몸가짐도 유학자의 모습을 갖추었으므로 산동의 유학자들 중 그에게 배우는 이들이 많았다.[2]

3. 가계


이름봉작명봉작 시기비고
하간공왕 유불해하간공왕하간헌왕의 뒤를 이음
유명자후기원전 130년 정월 임자일[5][6]
유은방광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5]
거양헌후 유둔거양헌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
누절후 유퇴누절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다른 이름: 유막(劉邈)[5]
유예아무대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다른 이름: 아무민후(阿武湣侯)[5]
삼호절후 유면삼호절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
주향절후 유금주향절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5][6]
유례평성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다른 이름: 성평후(成平侯)[5]
광후 유순광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5]
갑서후 유양갑서후기원전 126년 10월 계유일[6][5]
유담(劉擔)중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6]다른 이름: 천종후(千鍾侯) 유요(劉搖)[7][5]
심양후 유자위심양후미상[6]
경성원후 유옹경성원후기원전 68년 4월 계묘일[6]
평제엄후 유초평제엄후기원전 68년 4월 계묘일[6]
악향헌후 유동악향헌후기원전 68년 4월 계묘일[6]
고곽절후 유애고곽절후기원전 68년 4월 계묘일[6]


참조

[1] 서적 사기
[2] 서적 한서
[3] 문서
[4] 문서
[5] 서적 사기 권21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 https://zh.wikisourc[...]
[6] 서적 한서 권15 왕자후표 https://zh.wikisourc[...]
[7] 문서
[8] 문서
[9]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